● p. 27-28
이 십자가 모델은 새롭고 고도화된 형태의 하나 됨을 추구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총체적이지 못한 모델이 제시한 가능성을 뛰어넘는 더 위대한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십자가 모델은 ‘그리고’ 라는 특성으로 작동된다.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에서 그리고 그 십자가가 대변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이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신성 ‘그리고’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말씀 ‘그리고’ 육신이시다.
● p. 54
우리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 나의 성향을 따라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이와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끌리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공동체 전체를 품어야 하는 사명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헌신한 설교자라면 모든 청중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머리와 가슴 양방향으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
● p. 76-77
여전히 설교에 내재된 인간적인 요소들은, 당장은 결함이 있지만,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통전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인간이 설교자가 그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 아래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직적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 은혜에 달려 있다.
● p. 103
신학적 개념은 추상적으로 제시되는데, 이것은 때로는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개념에서 인간적인 배경을 제거하면, 복잡한 개념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설교에서 유용하고 중요한 측면이다. 하지만 사람은 추상적인 개념만으로 살 수는 없다. 설교가 삶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분주한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설교는 청중이 살아가는 시간 속에 펼쳐지는 삶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
● p. 163
설교가 길을 잃으면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다. 어떤 기대치를 이루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설교를 듣는다면 그 설교가 길 잃은 설교라는 걸 알 수 있다. 설교가 교회 보존에 관심을 두거나 세상을 공격한다면 길을 잃은 것이다. 교회 담장 밖에서는 들을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설교라면 실패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살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설교가 세상을 향해 요새를 쌓고 있다면 그 설교는 선교적 사명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