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김균진 교수의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이전 판의 내용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인 수정과 보강을 거쳐 보다 더 완벽한 형태로 선을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이 책은 한국인 신학자가 쓴 이 분야(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뛰어난 저술 중 하나일 것이다. 비록 조직신학자가 저술한 책이지만 동시에 신약신학의 연구 성과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참조한다는 면에서, 가히 조직신학과 신약신학의 만남 혹은 통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최소한 일곱 가지 기본 관점에 입각하여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전개한다. 첫째, 메시아적-종말론적 관점이다. 예수는 구약성서가 예고한 종말의 메시아적 구원자이자, 제2성전기의 유대사회가 고대하던 묵시적 구원자였다. 둘째, 성령론적 관점이다. 예수의 출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모두 성령의 개입과 역사하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성령은 개인에게 심리적 안정이나 만족을 가져다주는 영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불의를 타파하고 개혁하는 새 창조의 영인 동시에 억눌린 자들을 해방하는 자유의 영으로 예수와 동행한다. 셋째, 아래로부터의 관점이다. 예수는 관념과 신화의 산물이 아니라, 1세기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간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상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 형성된 초기 교회의 신앙고백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대한 연구와 이해를 요구한다. 넷째, 신학적 관점이다. 비록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담긴 심오한 의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1세기 팔레스타인의 다양한 정황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해도, 나아가 기독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 고백해온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철저히 신학적이어야 한다. 다섯째, 물질론적 관점이다. 이 말은 예수가 선포하고 실행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단순히 인간의 영혼 구원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총체적 현실을 변혁시키고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뜻이다. 여섯째, 여성학적 관점이다. 주지하듯이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였으며,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핵심에는 늘 여성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학적 관점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성과 어린아이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성애적 성품에 대한 신앙고백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곱째, 우주론적 관점이다. 예수가 꿈꾸고 지향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최종적으로 생태계를 포함하여 우주 전체의 회복과 재창조를 목표로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기여 내지 특징은, 저자가 십자가 신학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대목일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다루면서, 종래의 속죄신학을 창조적으로 변호할 뿐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폭력의 문제에 천착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당시의 불의한 권력에 의한 정치적 살해임을 밝히는 한편, 그러한 폭력적 현실이 까발리는 인간 세계의 불의한 현실을 고발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지배체제의 폭력에 오히려 비폭력적으로 희생당함으로써, 무력함을 통해 폭력을 굴복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 능력을 선명하게 증명하는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계시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여 마침내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성한다.
저자의 관심은 단순히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이론적 성격을 해명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텍스트 곳곳에서 저자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불우한 상황과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교하고 대비시키면서, 2천 년이라는 시간적-공간적 간격을 뛰어 넘어 역사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구원의 복음이 왜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지,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한국교회가 환골탈태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결국 이 책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론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한국교회의 자기갱신을 위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예수가 자신의 몸으로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는, 종교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종교의 형식들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의 형식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모든 종교적 형식들을 상대화한다. 이를 통하여 그것은 종교적 형식들의 본래 목적을 성취한다.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함으로써 율법의 본래 목적을 완성한다. 그가 가르친 “주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궁극적 희망과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제4부 “종교와 하나님 나라” 중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종교적 원인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 있어서 빌라도는 과연 무죄하였던가? 예수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실패로 끝나버렸던가?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실패가 아니라 궁극적 완성의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 속에서 인류의 죄가 용서받으며, 하나님 나라가 관철된다. 이 사실이 부활을 통하여 증명된다. 부활은 죽었던 예수의 재활이 아니라, 보편적 부활의 시작이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것은 소위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열어주는” 사건이다. 역사는 영원한 “되어감”(becoming)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미래로부터 현재 속으로 들어오는(coming) 과정으로 밝혀진다.
_제5부 “십자가와 부활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