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서는 예수가 그와 복음서 사이의 시기에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동일하지만 상이하게 보여준다. 공관복음서는 왜 예수가 그 시기에 기억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기억과 그의 활동과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형성되고 사용되고 전수된 방식들을 예증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영향력이 사라지거나 예수에 대한 후대의 신앙이나 교리가 덮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자신의 사역 동안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계속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는 그의 사역이 지닌 특성을 매우 선명하게 구현하는 전승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영향을 계속해서 끼쳤던 것이다.
_제2장 “예수와 복음서 사이” 중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요한의 판본은 공관복음서 전승이 입증하는 것처럼 예수의 가르침이 지닌 특징으로서 기억된 경구, 비유, 모티프 및 주제들의 심화였음을 의심하기 어렵다. 동시에 요한의 판본은 순수한 창작이 아니었으며, 오직 부활 신앙에서만 나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가 말한 것으로 기억되는 전형적인 것들의 심화였다. 후대의 “복음서들”(Gospels)과는 다르게 요한은 예수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보다 완전한 통찰이 예수의 부활 후 몇 사람에게 주어진 비밀스러운 가르침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은 이 통찰을 예수 전승 안에 뿌리박게 하는데, 이는 요한이 다른 교회들과 공유하며 예수의 사역에 대한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승이다. 요한에게는 이것이 예수에 대한 진리였다. 이는 공관복음서 같은 전승의 현학적 반복이 아니라 확장된 담론이 끌어낸 전승의 중요성이다.
-제4장 “매우 다른 판본! 역사적 예수를 위한 자료로서의 요한복음” 중에서
우리는 이제 예수와 바울 사이의 심연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가 가져온 기쁜 소식을 떠났거나 타락시켰다고 추론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의 메시지를 예수 자신은 알지 못했던 어떤 것으로 변형시켰다고 결론 내려야 하는가? 아니다!…바울은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거나 그를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예수의 진정한 제자 중 하나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높임을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제자이기도 하다.
_제5장 “예수의 선포로부터 바울의 복음까지” 중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의 변화하는 정체성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유대교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히브리인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로서,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자기이해는 더욱 양면적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자신이 이전에 평가했던 것처럼 가치 있게 평가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여전히 높게 평가되었지만 새롭게 정의되었다.
_제6장 “바울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했는가?” 중에서
“배교자 아니면 사도”라는 바울의 신분에 관한 우리의 질문은 유대교(또는 제2성전기 유대교)와 바울(과 기독교)의 관계라는 한도 내에서 답변될 수 있다.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이해했듯이, 그는 이스라엘을 저버린 변절자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바울은 이스라엘의 사도적 사명을 성취하려는 시도에 참여했다. 이 사명은 이방의 빛이 되는 것,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하나님의 구원하는 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유대교의 대변자다. 그는 자신의 영감과 동기를 대부분 이스라엘의 경전으로부터 가져온다. 그는 어떻게 이스라엘이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충실할 것인가에 관한 유대교의 논쟁에 기여한 유대인이다. 그의 목소리는 그런 논쟁 내에서 거의 철저하게 무시되어왔다. 그는 아직도 주로 이스라엘을 이탈한 변절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제2성전기 유대교의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다.
_제7장 “사도 아니면 배교자” 중에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유사한 견해를 가진다. 그들은 동료 신자들에게 실제로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없다.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에 핵심적이라고 여기는 전통과 예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이나 독특한 믿음들을 복음 자체만큼 중요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큼 중요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큼 중요하게 만든다. 그들은 면전에서 바울을 부정한다. 그들은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며, 전통의 특정 행위도 준수해야 한다고 그들의 행위로써 주장한다. 그들은 베드로의 편에 선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처럼 복음의 진리를 모욕하고 저버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식탁에, 우리 주님의 식탁에, 그분의 식탁에 앉지 않으려는 것으로 인해 바울이 자신들을 칭찬하리라고 실제로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_제8장 “복음-모든 믿는 자들을 위하여” 중에서
하나님의 교회로서 교회는 야웨의 카할과 완전한 연속선상에 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를 반유대주의라는 증오에 찬 전통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류 사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인종들과 문화들 사이의 화해가 발생하는 곳으로서의 교회도 지금껏 해왔던 것보다 한층 더 현실적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 아직도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기독교의 실패는 분명히 너무 오랫동안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무력하게 했고 불구로 만들었다. 성령의 교제로서 교회는 카리스마 공동체로서 성령이 수여한 은혜를 통해 기능하는 몸으로서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너무 오랫동안 도망했다.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자신을 숨겼다. 그리고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을 배우지 않고 성령의 생명이 카리스마의 과잉 속에서 끓어오를 때 그들은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관한 바울의 삼위일체적 가르침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천 년 전의 바울이 제기했던 도전은, 여기서의 다른 문제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무시했던 것이다!
_제9장 “교회-바울의 삼위일체적 교회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