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신의 모습을 모두 보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 마치 더러운 물로 가득 찬 양동이에는 신선한 물을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양동이에 신선한 물을 담기 위해서는 더러운 물을 비우고 양동이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지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마주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비우고 씻어낸다. 이것을 다름 아닌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런 뜻에서 시편의 인간은 성찰하는, 또 성찰해야 하는 유한한 인간이다.
_제1부 1장 “시편은 어떤 책인가?” 중에서
먼저 이콘과 기독교 미술은 성경 본문 이해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 화가는 성경 본문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시간의 변화와 공간의 이동이 있는 본문을 어떤 형태로든 이차원적 평면에 “구체화”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이는 화가의 그 “구체화”를 통해 본문 세계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로, 이콘과 기독교 미술은 성경 본문의 행간 읽기를 도와줄 수 있다. 화가의 그림을 통한 성경 본문의 “구체화”가 실제로 본문의 행간을 읽은 경우가 있다. 그런 그림들은 성경 독자가 본문을 새기고 본문 사이의 틈에서 그 뜻을 새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_제1부 2장 “시편을 어떻게 읽을까?” 중에서
현대 사회를 피로 사회로 규정하곤 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성과주의에 빠져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다 보니 결국 모두가 소진하여 피로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자발적 착취 가운데는 끊임없는 불안이 드리운다. 멈추면 누군가에게 뒤지거나, 누군가 그런 자신을 밟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라는 불안이다. 본문을 보면 어두운 데서 겨냥하는 강력한 대적의 화살이 떠오른다. 이럴 때 기도자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 피한다고 선포한다. 그런 태도는 가시적이고 유한한 가치 세계에서 무력한 도피로서 조롱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태도는 결국 유한함을 깨달은 기도자의 놀라운 신뢰를 보여준다.
_제2부 1장 “야훼는 성전에 계십니다(시편 11편)” 중에서
‘미쉬파트’와 ‘츠다카’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의 차원이다. 권력이나 재물을 더 가졌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고 미약한 존재라고 해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겨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공정하게 대우받는 현실, 그것이 ‘미쉬파트’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공동체가 수긍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절차와 내용을 거쳐야 한다. 또한 합법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형편에 대한 공감마저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진정한 ‘츠다카’다.
_제2부 2장 “공정함과 정의에서 나오는 평화(시편 72편)” 중에서
이스라엘의 정신사를 되돌아보면 포로기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다윗 언약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통찰은 곧 가시적 왕국이 다윗 언약의 전부라는 피상적이고 유한한 인식에서 벗어나 언약의 본질,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 정체성과 메시아 대망 사상이었다. 그러니까 비록 가시적 왕조가 아니더라도 메시아를 통해 종교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지속될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과연 포로기 이후 다윗 언약에 대한 이런 깨달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변경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한 계획을 그제야 깨달은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주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시다(히 13:8). 다만 역사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도록 해주신다.
_제2부 3장 “다윗 언약을 기억하며(시편 89편)” 중에서
오늘날에는 과연 이런 미신이 없는가? 고대 사회에서 제어할 수 없었던 자연 현상이 신격화되고 우상화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과학 기술이나 지식에 대한 과신이 신격화되고 우상화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인간들은 대상이 다를 뿐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다. 과학 지상주의 혹은 과학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풀고 제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보며 본문의 저자는 어쩌면 또다시 104편을 저작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_제2부 4장 “초월하시는 창조주 야훼(시편 104편)” 중에서
유월절은 야훼 하나님이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신 결정적인 사건을 기리는 절기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하나님의 좋으심과 인자하심을 되새기는 결정적인 계기다. 비록 현실은 건축자가 버린 돌 같은 처지지만, 하나님의 좋으심과 인자하심은 그런 처지를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바꿔주시리라는 신앙을 새롭게 다지도록 해준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온 인류를 위한 것으로 확장하도록 해주었다. 감사 제의에서 시작하여 유대인들의 유월절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장된 이 시편은 오늘 우리에게도 소망의 빛을 밝혀준다.
_제2부 5장 “야훼께 감사하십시오!(시편 118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