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당연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문화에서 어떤 이들은 너무 예수님께 붙들려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보다 무난하고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요구하는 메시지면 족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기독교가 충성스런 신도에게 건강과 부와 이런저런 일시적 보상을 약속하는 기분 좋은 종교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짓말에 속고 있다. 존 맥아더는 이런 견해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며 단호히 거부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 그분은 성경, 특히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을 소유했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관한 종교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복음서를 필두로 그분이 누구신지를 보여준다. 15쪽, 들어가는 글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과는 다른 메시아를 기대했다.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정치적 군사적 압제자로부터 구원할 분을 기대했다. 이런 유대인의 관점은 이방 정부에 의한 폭정과 유대인만의 자치정부 수립 실패로 말미암은 영향이 컸다. 그들은 정의를 구현해 줄 메시아를 갈망했다. 그날이 오기까지 그들은 고대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절기를 지키며, 율법에 순종하고 군사 행동을 준비했다. 예수님이 나타나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기대하던 방식을 따르지 않으셨을 때, 유대인들이 느꼈을 분노와 당황스러움을 생각해 보라. F. F. 브루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마음속에 담고 있던 메시아는 군사적인 이미지였지,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헤롯이든 로마든) 압제자의 멍에를 백성의 목에서 벗겨줄 다윗 가문의 왕이 오리라는 약속은 바로 그때 그 시대의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 받아들여졌다.” 53쪽, 메시아 소망(1장 간과된 시대-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도시에는 일반적으로 극장, 원형 극장, 목욕탕, 사원, (고대 로마에서 재판이나 공적인 집회에 사용한 큰 건물인) 바실리카, 장식용 분수, (대형 건물 입구에 기둥을 받쳐 만든 현관 지붕) 포르티코가 있었지만, 도로는 너무 좁고, 위생 문제가 심각했으며, 인구가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었다. 일반 가정집은 보통 협소하고 불결했던 탓에 사람들은 (일을 하든 여가를 즐기든)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바깥에서 보냈다. 토착민이든 이민자든 같은 민족끼리 모여 살았고, 그 중에서도 직업이 같은 사람들끼리 더 가까이 모여 살았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에 데려와 복음을 전하고 사역자로 세우기 위해) 다소에 갔을 때 그곳에서 (장막 만드는 사람들 중에 있을) 바울을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행 11:25-26). 마찬가지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찾는 일도 쉬웠을 것이다(행 18:1-3). 65쪽, 도시의 삶(1장 간과된 시대-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에더스하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그분의 삶과 사역이 어떻게 ‘시험’과 함께 시작되는지 알게 될 거라고 설명한다. 에더스하임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으로, 유대교 안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고 말한다. “유대교에선 예수님 같은 메시아를 상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정치적 압제자들에게서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고, 인간이 겪는 모든 모욕을 당하셔야 하며,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빌 2:1-11). 에더스하임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신 이야기도 성경의 신뢰도를 높여준다는 데 동의한다. 이는 “유대교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45 복음서 기자들이 유대인을 설득할 목적으로 가공된 이야기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굳이 유대교의 메시아 개념과 배치되는 사건을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202쪽, 그리스도가 시험을 받으심(5장 예수님의 탄생에서 공생애 시작까지)
성경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치유를 행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신다. 여기서 강하게 함축하는 바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기사는 믿음과 치유 사이의 분명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은 것은 그 바탕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관성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줄곧 강조되는데, 특히 누가가 그렇다(막 5:34; 10:52; 눅 7:50; 8:48; 17:19; 18:42; 행 3:16; 4:9-10; 14:9; 15:9, 11; 16:31). “낫게 하다” make well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소조’ sozo는 ‘구원하다’ save는 의미가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구원하다’를 의미할 때도 이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된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흥미로운 대목이다. 사람들의 믿음은 때로 그들의 치유로 이어진다. 235쪽, 중풍병자를 고치심(6장 사람을 낚는 일에서 황금률까지)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