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주해와 해석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실제적 과정을 지시하는 반면, 해석학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적용할 때 우리가 행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묻는 이차적 과제를 포함한다. 해석학은 책임감 있고 타당하고 풍요로우며 적합한 해석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작동하는 조건과 규준들을 탐구한다. 해석학이 다양한 학문 분야의 도움을 요청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해석학은 왜 우리가 이해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제기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자기성(selfhood), 이기심, 자기기만에 대한 심리적·사회적·비판적 질문들을 제기해야 할 이유도 보여준다. 해석학은 텍스트의 본성과 효과, 텍스트의 힘에 대해 다루는 문학이론이 제기하는 질문들의 존재 이유도 보여준다. 또한 성서학에서, 교회사와 여타 다른 신앙 공동체들에 대한 해석에서, 교리와 신학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왜 물어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제1장 중에서)
해석학과 충분히 친숙하게 된다면 우리는 주어진 관점과 잠정적인 선이해 사이를 타협시키는 일이 타협 불가능한 고정된 전제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문제가 전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예비적 이해와 책임감 있는 해석의 여정이 충만한 이해를 향해 펼쳐져 있는 길 위에는, 전체와 부분이 함께 씨름함으로써 얻어진 빛 안에 재교섭, 재형성, 교정을 위한 빈 공간이 남아 있다.···해석학은 어떤 변형이나 발전에 대해서도 “닫혀 있는” 딱딱하고 유연성 없는 완결적인 형태로 형성된 사유 체계를 조장하지 않는다. 해석학적 탐구에서 해석자의 지평은 언제나 움직이는 동시에 팽창하고 있으며, 항상 새롭고 신선한 평가에 종속되어 있다. 그럼에도 해석학은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사유의 중요성 또는 느슨하고 유연한 의미에서의 “시스템”의 출현을 배제하지 않는다. (제1장 중에서)
가다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지평” 개념, 즉 “어떤 특수한 시점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평” 개념을 자기 것으로 흡수한다. “지평은 우리가 그 안으로 움직여가는 어떤 것,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움직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평들이 바뀌어간다. 따라서 과거의 지평은…언제나 움직임 중에 있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작업은 역사적 의식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즉 자신을 타자의 자리에 놓아봄으로써…타자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제11장 중에서)
시간은 현존재에 의해 지각되는 대로의 “내러티브화된 시간”이다. 플래시 백(회상), 플래시 포워드(선취), 지각에 따라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는 현상 같은 것은 연대기적 시간의 예외 정도가 아니라 인간 경험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이다. 선취나 기대는 순수한 미래성 자체보다 훨씬 더 “본래적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성은 이를 넘어서서 통일성을 가진다. 여기서 딜타이는 삶의 “연결성”을 보았는데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결성”이다. 내러티브와 해석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바처럼 인류는 시간 “안에서” 존재한다. (제12장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미덕을 사랑(agape)이라는 용어로 해석한다.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에 따르면 만약 자아를 책임성으로 소환하는 “타자”가 없다면 안정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상호성의 윤리가 남아 있다. 상호성의 윤리는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와 연관된다. 여기에 대해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말한다. 자신을 줄 수 없는 무능력은 자아의 통전성에 대한 위반을 구성한다. 자아는 타자에게 공감과 동정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배려가 무엇인가에 대한 최상의 검토 기준이 된다. 이런 자아는 친구의 연약함으로부터도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행위는 대체 불가능하게 “나 자신”이 되는 행위이다. 또한 강제적인 사법 체계, 정치적 토의와 행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제12장 중에서)
일부 탈식민주의 해석자들과는 대조적으로, 해방신학자들이 성경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후안 루이스 세군도, 세베리노 크로아토는 기독교 신학을 성경과 라틴아메리카의 삶-컨텍스트 사이의 변증법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인간의 컨텍스트에 의해 제기되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경향을 보이며 따라서 이 신학자들은 스펙트럼에서 슐라이어마허와 함께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틸리히의 언급처럼 인간의 질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