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면 많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인 신비주의, 부도덕, 폭력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것은 ‘우상 숭배’라는 단어다. 바벨탑은 온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시적 명령에 반대하기 위해 지어졌다. 대신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기 위해 하늘에 도달할 탑을 쌓기로 했다. 그들의 의도는 하나님보다 별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욕을 섬기는 것이었다. ……
바벨론 역사 전반에 걸쳐 반란이 계속되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이교도 신들에게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 오늘날, 우리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사기 의식(낙태)의 제단에서 희생시킨다. 우리는 돌 우상 앞에서 절하지 않는다. 대신 돈, 권력, 섹스의 신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하는 ‘형식적’일 때가 너무 많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적대적인 문화에서 소수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추방자다. -p.44-45
물론 우리는 문화에 반대해야 하지만, 반드시 예수님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의 마음가짐으로 문화에 대항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를 이해하며, 우리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고, 양심이 허락하는 한 그것을 받아들여야겠지만, 그다음에 선을 긋고 “더는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게 이교도의 주변 환경과 거리를 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셨다. 우리가 이미 배운 대로 그들의 목표는 ‘도시의 평화’를 찾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을 그을 지점에 대한 지혜를 주셨고, 결국,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교도 정부와 협력하고 도와야 했다.
그들은 우리가 성숙하여 선을 그어야 할 지점을 안다면 악한 사람을 섬길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람이 그런 섬세한 임무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느부갓네살을 진정한 하나님께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94-95
예수님이 우리 마음과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검색하신다고 상상해 보라!
1세기 교회가 이세벨의 관능을 피할 수 없었다면, 유비쿼터스(어디에나 존재하는) 매체를 통해 우리 모든 가정에 침투하는 이세벨의 더 큰 유혹을 21세기 교회는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이세벨은 이제 우리 손안에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필요한 도움을 구할 수도 없는 너무 부끄러운 사람들, 교회는 침묵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혼자 싸워서는 결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교회로서 순결한 신부를 찾는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자들의 교제에 소망이 있다. -p.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