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한 가지 습성이 있습니다. 생각이 막히거나 온갖 생각들이 엉켜서 도무지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일단 책상머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무작정 걷습니다. 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걷기를 위한 걷기처럼 보입니다. 딱히 목적을 갖고 걷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 걷겠다는 계획도 없습니다. 그런데 걷다보면 어느새 헝클어지고 엉켰던 생각들의 갈피가 하나씩 정리되는 걸 깨닫습니다. - 30쪽
걷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각도 따라 걷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생각의 속도가 몸의 속도를 따라간다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앉아있을 때는 제어되지 않던 생각의 속도가 걸을 때는 순하게 누그러집니다. 그러니 걷기는 단순한 몸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기도 합니다. - 34쪽
사랑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로 똘똘 뭉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쓸모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만나는 나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지는 내가 정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만나는 나에게 ‘오늘의 나여서 고맙다’라고 말을 건네 봅니다. - 40쪽
고독은 자신의 영혼을 차가운 물에 적셔 촉촉하게 하기도 하고, 물기를 너무 머금어 무겁게 쳐졌을 때는 햇살 좋은 날 널어 뽀송뽀송하게 말려주기도 합니다. 그걸 엇박자로 대하거나 고립과 뒤섞인 채 혼동하면 감당하기 어려워 아예 홀로 있음을 피하게 됩니다. - 45쪽
마음만 먹으면 일상도 여행이 됩니다. 익숙한 길을 걸을 뿐,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은 아닙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보면, 같은 곳에서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비슷한 구름을 볼 뿐, 같은 구름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처럼 같은 음식점에서 같은 음식을 주문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장면을 만나듯 우리는 날마다 다른 하루를 여행하며 삽니다. 날마다 처음 만나는 아침을 맞이하고, 날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스치고, 날마다 처음 만나는 저녁과 이별합니다. - 53쪽
바람과 불의 관계가 참 묘합니다. 등불이나 등잔불, 촛불은 바람이 불면 견디다 꺼지고 맙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약하디 약합니다. 그런데 불씨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합니다. 입으로 직접 바람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부채나 송풍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때 바람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불을 일으킵니다. - 80쪽
큰바람을 홀로 이겨낼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함께할 누군가가 없으면 견디다 쓰러지고 맙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란 광풍 속에서 우리는 함께함의 소중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타자의 고통과 불행을 공감하는 것에서 인간다운 삶이 시작됩니다. 시작점이 중요하지만, 시작점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고통과 불행을 줄일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 85쪽
숲은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공동체입니다. 한 그루 나무로는 거센 바람 견뎌내기 어려울 때도 많지만 숲의 나무들은 서로 지탱해주고 막아주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냅니다. 서로를 막아주고 지켜주며 함께 거센 바람 이겨냅니다.
숲의 나무들이 어찌 모두 다 만족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마음껏 옆으로 가지와 잎을 내고 하늘 위로 마냥 솟아오르고 싶겠지요. 그런데 옆의 나무들이 그 자리를 내주지 않으니 야속할 듯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옆의 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서로 허락하면서 조화롭게 자신에게 허락된 만큼의 공간 안에서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랍니다. 그런 공존의 지혜와 양보가 없다면 숲을 이루지 못합니다. - 88쪽
코로나19 팬데믹은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멈추게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렇다면 돈 많은 사람들이야 안전한 외국으로 잠깐 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 세계가 팬데믹의 상황이니 오갈 데가 없습니다. 돈과 시간, 그리고 건강만 허락되면 언제든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이미 과거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 자체가 두렵고 꺼려집니다. 경험하지 않았고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 벌어진 겁니다. 사람에게 사람이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적군을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두려운 존재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 118쪽
이 상황에 이르니 과거가 그립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고 그저 이 날이 그 날 같기만 한 일상의 반복적 나날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그때는 걸핏하면 어제와 같은 오늘이 지겹고 야속했는데 돌아보니 그것만큼의 축복이 또 없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게 무탈하다는 것임을 이런 방식으로 느끼게 되는 건 야속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런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건 나름의 소득일 수 도 있겠습니다. - 119쪽
나무의 결을 생각하고 그 결을 장인의 손에 맡기듯 나의 결을 발견하고 그 발현을 신에게 맡기는 것이 바로 신앙이고, 그런 태도를 내가 지니며 수행하는 것이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인은 나무를 만지면서 그저 목재로만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고약한 옹이로 보여도 그것만이 간직한 잠재적 소리의 울림을 느끼고 어디쯤 있을 때 그 울림이 가장 적절하고 옹골찰지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모을 것입니다. 나무가 말을 한다면, 영혼이 있다면 장인의 그런 점 때문에 말없이 자신을 맡기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 258쪽